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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시민’을 위한 특별한 제언
장하준 교수는 과거 어느 책 서문에 자신의 ‘발작적’ 글쓰기 습관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본다며 미안함을 표시한 적이 있다. 물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컴퓨터를 켜는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을 에둘러 표현한 말일 게다. 그러나 장하준 교수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유감스럽게도 그의 ‘발작’기운이 언제 다시 도질지 손꼽아 기다려야 할 듯하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저자 장하준 교수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장 교수의 해외 강연과 회의 참석 등 빡빡한 일정 때문이었다. 그는 11월 10일부터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미국·아일랜드·아르헨티나·네덜란드 등 4개 나라를 다녀왔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네덜란드어판 출간 기념 강연을 제외한 나머지 해외 출장은 신간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투기 자본가’로 유명했던 조지 소로스 재단이 주최한 회의에 참석했고, 아일랜드에서는 코메디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세계 경제의 현실을 풍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아르헨티나의 집권 페론당 주최 경제발전 전략회의에는 유일한 외국 학자로 초청받았다. 몸이 서너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 이 스타 경제학자에게 최근 근황부터 물었다. 그러나 그는 “학생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에게 근황이랄 것이 뭐 있느냐, 단조로운 생활의 연속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성기영 ‘장하준 신드롬’이라는 말이 언론에 등장할 정도로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이 빠른 시일 안에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영국에서도 이런 사실을 실감하고 계시는지요? 장하준 글쎄요. 사실 실감할 계기는 없었습니다. 가끔씩 기회 있을 때 한국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대형서점에 책을 높이 쌓아놓고 팔더라는 이야기를 전해준 적은 있습니다만 사실 저로서는 이런 일을 처음 당해보는 것이어서요. 저처럼 경제학 관련 주제를 다룬 논픽션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보고 놀란 것이 사실입니다. 성기영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이렇게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스로 평가하는 요인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장하준 저는 평소에도 한국 출판계에 사회과학 서적에 대한 저변이 상당히 넓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당장 영국 독자와 비교해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 중에서 사회과학 관련 서적을 읽는 사람들은 매우 한정돼 있어요. 게다가 최근 한국 사회에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 말하자면 경제학이 가치중립적일 수 있는가 등의 문제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고 봅니다. 성기영 과거의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 또는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이번 책을 비교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요. 장하준 이론적 입장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제를 놓고 보자면 신간에서는 과거 다뤄왔던 개발도상국이나 세계화 문제 등을 뛰어넘어 선진국 내부의 문제를 더 많이 다루고자 했습니다. 흔히 신자유주의는 후진국에게 해로울 수 있어도 선진국에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후진국에게 더 해롭기는 하지만 선진국에도 좋은 처방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성기영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펴내기로 결심하게 된 구체적 동기가 있었습니까? 장하준 제가 몸담고 있는 학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소통하면서 학술적인 내용을 좀 더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민해 왔습니다. 사실 본격적 대중서적을 써보자고 시작했던 책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인데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후진국 경제발전 문제 등에 대해 관심이 덜한 선진국 독자들도 한 번 겨냥해 보자고 생각해 본 것이죠. 성기영 경제(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경제현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흔히 합니다. 경제에 대한 관심 만큼 경제를 잘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하준 많은 사람들이 경제를 어렵게 생각한다면 무엇보다도 경제학자들의 잘못을 먼저 지적해야 합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다 알기를 기대할 수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전문가들이 쉽게 풀어 써주어야지요. 전염병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더라도 정육점이나 식당의 위생 기준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지 않겠어요?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은 2008년 금융위기를 보면서 ‘금융 규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구나’ 하는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성기영 이번 신간에서 특히 ‘경제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강조한 대목이 보입니다. 경제시민은 어떤 개념이며 어떠한 권리를 어떻게 행사해야 합니까? 장하준 제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즐겨 하는 말 중에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이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건축가는 집 잘 짓는 방법을 알면 되고, 은행가는 돈 꿔 주고 제 때 이자 챙겨서 되받는 방법을 알면 됩니다. 그러나 민주사회의 시민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복지면 복지, 국방이면 국방, 이렇게 모든 분야에서 알아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물론 어려워 보이는 이슈들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기본 원리 정도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누구라도 말할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발언하는 것을 포기하기 시작하면 정부 또는 누군가가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아도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이죠. 성기영 그러나 정작 일반 시민들은 청년 실업이니 고용 불안이니 하는 불안정한 주변 상황을 명분 삼아 경제시민을 자처하고 나서기를 꺼려하는 듯 보입니다. 장하준 고용 불안이나 청년 실업이라는 현상도 따지고 보면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해야 더욱 열심히 일한다’는 잘못된 가정에 입각해 정책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고용이나 성장보다는 물가 안정에만 초점을 맞춘 경제정책 등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단기 이익을 챙기는 데만 급급한 주주자본주의 체제를 뜯어 고치고 국경간 무분별한 자본 이동에 적절한 규제를 가하는 거시적 차원의 접근 없이는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기영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과 에피소드들을 어떻게 수집하고 관리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을까요? 장하준 책을 읽다가 또는 해외 출장 중에 어떤 에피소드를 접하면 늘 어떤 이론과 접목시켜서 설명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따로 요약해 두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제가 원래 잡학(雜學)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MBC 장학퀴즈 프로그램에 출전한 적도 있었고요. 비록 주장원에 그치기는 했지만. 또 제가 공부해 온 영국의 지적 풍토가 이런 역사적 접근법을 존중해 주었다는 점도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지요. 성기영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과거에 국책 연구원이나 몇몇 대학의 교수직에 지원하신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장하준 ㅣ 아직도 한국 국적을 갖고 있으니까(영국에서는 합법적인 장기 거주자에게 국적 신청 자격이 주어진다) 언젠가는 돌아가겠죠. 하지만 당장 1~2년 사이에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사실 80년대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도 한 5년 정도 공부하고 오려고 계획했던 것인데 벌써 25년이 흘렀잖아요? 당장 마음먹는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성기영 다음 저서를 벌써부터 궁금해 하는 독자들도 많습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장하준 아직 다른 책을 집필할 계획은 없습니다. 사실 제가 꾸준히 계획을 세워놓고 일관되게 책을 써나가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편집자 주 저자 장하준 교수와의 인터뷰는 전(前) 신동아 기자인 자유기고가 성기영 씨가 영국 현지에서 진행한 것입니다. 현지 취재에 도움을 주신 도서출판 부키의 박윤우 대표와 쉽지 않은 인터뷰를 성사시킨 성기영 씨에게 특별히 고마움을 전합니다.
저자 장하준 장하준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이래 케임브리지 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2003년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 상을, 2005년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예프 상을 최연소로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주요 저서로는 『사다리 걷어차기』『쾌도난마 한국경제』『국가의 역할』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