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맬서스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영어 Thomas Robert Malthus, 1766년 2월 14일 ~ 1834년 12월 23일)는 영국의 인구통계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영국 왕립 학회 회원이었다. 인구 증가에 대한 이론으로도 유명하다. 오늘날 그는 토머스 맬서스로 불리고 있으나, 그는 생전에 로버트로 불리기를 원했다.
생애[편집]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는 영국 서리 주 길드포드에서 대니얼 맬서스와 헨리에타 맬서스 사이에서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부유했으며 아버지 대니얼은 데이비드 흄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며 장 자크 루소와도 알고 지냈다. 토머스 맬서스는 집에서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후, 1784년 워링턴에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지저스 컬리지로 진학하였다. 대학에서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 독법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였으나 주된 연구분야는 수학이었다. 맬서스는 1791년 학위를 수여 받았고 2년 뒤 전임 교수가 되었으며, 1797년 성공회의 성직자로 서품되었다. 앨버리에서 부제가 되었으며, 재임중에 '인구론'을 발표하였다.
맬서스는 1804년 그의 종질인 헤리어트 에커설과 결혼하였으며 둘 사이에 세명의 자식을 보았다. 1805년 맬서스는 헤일리 베리 동인도대학의 영국 수석 교수로 부임하였다. 1818년에는 영국 왕립 학회 회원이 되었다. 한편, 맬서스는 언청이를 치료한 1833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다. 언청이는 집안 내력이었다.
토머스 맬서스는 1834년 사망하였으며 바스 대성당에 묻혔다.
인구 이론[편집]
맬서스는 1798년 〈인구의 원리가 미래의 사회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소론 - 고드윈, 콩도르세, 그리고 그 외 작가들에 대한 고찰을 포함하여(영어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 as It Affects the Future Improvement of Society, with Remarks on the Speculations of M.Godwin, M.Condorcet,and Other Writers)〉의 초판을 익명으로 출간하였으며 1826년까지 6번의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매 개정판에는 새로운 소재, 당시 세계각국의 인구통계, 비판에 대한 대응, 자신의 입장 변화 등을 담아 논문을 보강하였다.
맬서스는 역사 속의 모든 인구 증가가 결국 빈곤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인구의 증가가 식량과 같은 자원의 증가보다 급격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맬서스의 인구 성장에 대한 가설은 아래와 같다.(논문의 1798년 판)
- 생존은 인구 규모에 의해 강한 제약을 받는다.
- 생존 수단이 증가할 때 인구도 증가한다.
- 인구 증가의 압력은 생산력의 증가를 필요로 한다.
- 생산력의 증대는 더 큰 인구 성장을 기대하게 한다.
- 생산력의 증대가 이러한 인구 성장의 필요 정도를 지속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인구 성장의 수용력은 한계에 봉착한다.
- 성행위, 노동, 아이 등을 위한 개인의 비용/수익이 인구의 증가 또는 감소를 결정한다.
- 인구가 생존 가능한 규모를 초과하면
- 자연은 사회 문화적인 잉여(잉여 인구)에 대해 특정한 효과를 부과하게 된다. - 맬서스는 이러한 특정한 효과의 예시로 빈곤, 악, 곤경 등을 들었다.
그는 인구의 자연 증가는 기하 급수적인데, 식량의 생산은 산술 급수적이므로, 인간의 빈곤은 자연 법칙의 결과라 하고, 이것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합리화하여 사회주의적 사상에 반격을 가하였다.
또 그의 <경제학 원리>는 리카도에 반대하여 부·노동·가치·차액 지대·공황 등에 관한 자기 주장을 서술한 것인데, 전적으로 지주 및 자본가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1]
영향[편집]
맬서스의 인구 이론은 당대 뿐 아니라 후세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야에 매우 강한 영향을 주었다. 과학에서는 찰스 다윈, 알프레드 월리스등의 진화론 학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78년 마이클 하트가 발간한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맬서스는 80위로 소개되고 있다.
맬서스는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에 대해 과잉이란 표현으로 개념화하였다. 그의 이론은 당대에는 종종 놀림거리로 취급되었으나, 오늘날에는 후세의 대공황과 케인즈의 등장을 예견한 것이란 평가를 받는다.
맬서스 이전의 경제 비평가들은 높은 출산율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했는데, 인구의 증가는 노동 인구와 경제활동 인구의 증가로 이어져 경제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맬서스는 인구 증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으며, 이로 인해 여전히 높은 출산율이 총생산 증가에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제학자조차 급격한 출생율 증가는 수용가능량 당 생산량의 감소를 가져온다는 것에 동의하게 하였다. 데이비드 리카르도(맬서스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나 앨프레드 마셜은 맬서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맬서스주의의 영향력은 정치로 확대되어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윌리엄 피트로 하여금 빈자법에 의한 빈자의 지원을 중단하게 하였으며 휘그당은 맬서스의 저작으로 인해 토리당의 온정주의와 결별하고 1834년의 빈민법 개정을 주도하게 한다. 또한 맬서스의 인구 이론은 1801년 영국 최초의 근대적 인구 조사가 실시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비판[편집]
당대의 비판[편집]
1820년 윌리엄 고드윈은 맬서스의 인구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 《인구에 대하여》를 저술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 나소 윌리엄 시니어와 같은 경제학자들, 로버트 오웬과 같은 산업가, 윌리엄 헤즐리트와 같은 논객, 윌리엄 코베트와 같은 윤리학자 등도 맬서스의 이론에 비판적이었다.
마르크스주의[편집]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9세기 중엽 그들의 공동저작들을 통해 맬서스의 이론을 비판하였다.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면 맬서스가 주장하는 생산 수단 상의 인구 압박의 문제는 실은 인구에 대한 생산 수단의 압박일 뿐 이었다. 즉,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값싼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얻기 위해 실업상태에 있는 예비 노동자군을 반드시 필요로하며 맬서스가 말하는 과잉 인구란 실은 자본주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상대적 과잉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생물학[편집]
찰스 다윈 (Charles Darwin, 1809∼1882)이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의 『인구론』(Essay on the Principles Population, 1798년 출판)을 읽고,(다윈 자신의 말에 의하면) '흥미삼아' 읽은 이 책의 내용이 다윈이 직면하고 있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인간사회의 치열해져 가는 생존경쟁에서 이기고 환경에 잘 적응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맬서스의 이야기는 다윈으로 하여금 '경쟁'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해 주었다. 곧, 이 같은 '경쟁'이 어떤 종의 여러 개체 중에서 환경에 잘 적응하는 성질을 가진 것만이 살아 남을 수 있도록 하는 선택의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 같은 성질을 가진 개체들만이 살아 남아서 종의 성질이 그 같은 방향으로 변화하도록 '선택'할 것이다. 또한 다윈은 『인구론』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 안에서의 이 같은 '경쟁'을 같은 지역내의 여러 종들간의 경쟁으로 확장해서, 적응의 대상이 되는 환경에 한 종과 경쟁하고 있는 주위의 다른 종들도 포함되도록 했다. 기후, 풍토 등의 물리적 환경이 똑같은 갈라파고스군도의 서로 다른 섬들에서의 각각 다른 동식물 분포는 이 같은 종들간의 경쟁에 의해 설명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 진화의 메커니즘이라는 다윈의 이론의 핵심이 형성되었다.
로날드 피셔는 그의 책 《자연 선택의 유전학》에서 맬서스의 이론이 실제 자연 선택과 어긋남을 지적하였다.
낙관론[편집]
19세기의 경제학자들 중 일부는 노동의 분업과 특화 및 자본 투자의 증가와 여러 요인들로 인해 맬서스의 경고는 기우에 그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기술의 진보와 자본 설비의 증대가 없다 하더라도 노동력 공급의 증가는 수확 체감의 법칙을 극복하고 생산력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 확신하였다.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맬서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제이호크(매의 일종)와 사람은 둘 다 닭을 먹는다. 제이호크가 닭을 잡아 먹으면 닭의 수는 줄어들 뿐이지만, 사람들이 닭을 먹을 때는 닭은 증가한다."[2]
wiki 참여하면서 검색한 결과.(ref: http://science.postech.ac.kr/hs/C17/C17S002.html
다윈이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의 『인구론』(Essay on the Principles Population, 1798년 출판)을 읽은 것은 바로 이 때였다. 그리고 다윈 자신의 말에 의하면 '흥미삼아' 읽은 이 책의 내용이 다윈이 직면하고 있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인간사회의 치열해져 가는 생존경쟁에서 이기고 환경에 잘 적응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맬서스의 이야기는 다윈으로 하여금 '경쟁'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해 주었다. 곧, 이 같은 '경쟁'이 어떤 종의 여러 개체 중에서 환경에 잘 적응하는 성질을 가진 것만이 살아 남을 수 있도록 하는 선택의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 같은 성질을 가진 개체들만이 살아 남아서 종의 성질이 그 같은 방향으로 변화하도록 '선택'할 것이다. 또한 다윈은 『인구론』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 안에서의 이 같은 '경쟁'을 같은 지역내의 여러 종들간의 경쟁으로 확장해서, 적응의 대상이 되는 환경에 한 종과 경쟁하고 있는 주위의 다른 종들도 포함되도록 했다. 기후, 풍토 등의 물리적 환경이 똑같은 갈라파고스군도의 서로 다른 섬들에서의 각각 다른 동식물 분포는 이 같은 종들간의 경쟁에 의해 설명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 진화의 메커니즘이라는 다윈의 이론의 핵심이 형성되었다. 맬더스
http://science.postech.ac.kr/hs/C17/C17S002.html
http://m.hankyung.com/apps/column.view?id=_column_438_1&no=474&category=4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서양에서 18세기는 ‘위대한 세기’‘찬란한 세기’ 등 긍정적인 이미지가 보통 따라 붙는다. 절대왕정과 계몽주의, 시민혁명의 시대라는 프리미엄이 적지 않은 것이다. 또 이 시기는 ‘꾸준한’ 경제발전이 이뤄진 시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시기는 “(식민지 개척에 따른) 생활공간 확대와 식량증대의 시기”로 불렸다. 최근에는 이 시기를 ''''소비혁명''''이 발생한 시기이자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의 시기로 보기도 한다. 그 결과, 인구도 증가했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라 차이가 크긴 하지만 18세기 100년 동안 유럽 인구는 9500만명에서 1억4600만명으로 증가했다. 세계 인구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도 1700년 17~18%에서 1800년에는 20% 내외로 높아졌다. 1700년 70만~80만명으로 추산되는 프랑스의 부르주아 수는 1789년 대혁명 직전에는 230만명까지 늘었다. 전체 인구증가율을 훨씬 웃도는 자본가 계층의 증대는 상업의 발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괄목할 만한 인구증가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에선 자연환경이 인구를 조절하는 ‘멜서스적 인구조정’이 두 번이나 크게 작동했다. 1740년대초와 1770년대에 걸쳐 대규모로 사망자가 급증하는 ‘인구 청소’가 단행된 것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유럽의 인구증가율은 1600~1650년 6.2퍼밀(‰), 1650~1750년 사이 2.4퍼밀, 1750~1800년 사이 증가율 4퍼밀로 추산했는데 이는 순환적 인구감소 현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중 첫번째 멜서스의 함정 물결이 휩쓴 1740년대 풍광은 다음과 같다. 174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에는 거대한 사망률 증가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갔다.
유럽대륙 전체에서 1740년에는 전년에 비해 사망자 숫자가 21% 늘었다. 1742년에는 기록된 사망자수가 1739년에 비해 24% 증가해 정점을 이뤘다. 이는 인구위기 발생전인 1735년에 비해선 사망자수가 43%나 늘어난 것이다.
사망률이 피크를 이뤘던 1740~1742년 기간은 유럽 각지에 전염병이 번진 시기이기도 하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이질, 티푸스, 장티푸스, 천연두, 희귀 열병 같은 각종 전염병들이 훑고 지나갔다.
설상가상 서유럽과 북유럽, 중부 유럽에서 흉작이 발생했다. 1693~1694년, 1708~1709년, 1740~1741녀는 대흉작의 해로 기록됐다. 기상재해와 재난도 잇따랐다. 이에 따라 평균 곡물가격이 1738년에서 1740년 사이에 60%나 껑충 뛰었다. 그리고 한번 높아진 곡물가격은 1742년까지 떨어지지 않고 지속됐다. 몇몇 지역에선 곡물가격이 두배나 오르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선 1737~1738년 보다 1740~1741년에 곡물가격이 77.0% 뛰었고 덴마크에선 같은 기간 곡물가가 71.4% 올랐다. 핀란드는 67.1%, 스웨덴은 60.0%, 아일랜드는 56.7% 급등했다. 스코틀랜드(52.9%), 독일(47.6%), 노르웨이(44.1%) 등도 식료품값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남부 유럽은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었지만 이탈리아(37.2%), 프랑스(35.7%) 오스트리아(33.7%), 잉글랜드(32.9%), 스위스(30.7%) 등도 30% 이상 부담이 급증하긴 마찬가지 였다.
이처럼 곡물가격이 비싸지면서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장기 영양부족 상태가 야기됐다. 당시 저소득층은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인구의 절대다수가 배를 곪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기 중반 유럽의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들에선 음식물과 음료 소비에 드는 비용이 가계 전체수입의 60~7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같은 곡물가 상승의 여파로 1735~1739년에 비해 1740~1742년의 사망 증가율도 크게 높아졌다. 다만 곡물가 상승률과 사망자 증가율이 비례하지는 않았다. 노르웨이 사망자수가 81.0% 늘어난 것을 비롯해 핀란드 51.8%, 아일랜드25.3% 등의 사망률이 높았다. 프랑스도 24.5%나 사망자가 늘었고 잉글랜드는 23.4% 상승했다. 아일랜드 노르웨이 핀란드 등은 식량부족의 여파로 죽은 사망자 증가율이 당시 러시아와 한참 전쟁 중이던 스웨덴(22.7%)의 사망자 증가율을 크게 웃돌기도 했다. 전쟁 보다 굶주림이 훨씬 무서운 재앙이었던 셈이다.
당시 프로이센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농작물이 발트해를 거쳐 암스테르담을 거점으로 북유럽 각국에 제공되는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안방에서 생산되는 작물생산이 급감하면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18세기의 두차례 인구위기에 대해 역사학자 존 포스트는 “곡물가가 2년 이상 50% 이상 급등할 경우 사망률과 질병 전염비율이 따라서 급증한 것은 명확하다”면서도 “다만 산업화 이전 시기의 전염병에 의한 사망률 증가가 주로 영양부족에 의해 기인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말했다. 각 지역별로 영양부족이 모두 똑같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영양부족과 전염병간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는지 파악은 쉽지 않은데 이는 주거환경과 개인 위생 수준, 주변 자연환경의 차이, 국가와 사회의 대응 역량의 영향도 받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농업기술도 어느정도 인구감소의 충격에 완충역할을 했다.
<참고한 책>
John D. Post, ‘Nutritional Status and Mortality in Eighteenth-Century Europe’, in Luciel F.Newman(edited), Hunger in History-Food Shortage,Poverty and Deprivation, Blackwell 1995
James C. Riley, ‘A Widening Market in Consumer Goods’, in Euan Cameron(edited),Early Modern Europe-An Oxfor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일상생활의 구조 上, 주경철 옮김, 까치 1995
이영림·주경철,·최갑수, 근대 유럽의 형성-16~18세기, 까치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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